봉황이 둥지를 틀고 앉은 형상이라 해서 이름 붙여진 ＇봉좌산｀ 기슭에 경주 김씨가 일가를 이루고 사는 경북 포항시 북구 기계면 봉계리． 내가 태어나서 ３６년을 붙박이로 살아온 곳이다． 나는 이곳에서 남의 땅 소작을 하며 근근히 입에 풀칠하고 사는 집안의 ５형제중 넷째로 태어났다． 친구의 입학식에 따라갔다가 취학 대상자가 아닌 일곱살에 입학을 한 개구쟁이였지만， 착하고 공부 잘하고 예절 바르다는 동네 어른들의 칭찬을 늘 들으며 자랐다． 어렵게 어렵게 중학교까지 다니긴 했으나 점심시간마다 남몰래 물배를 채웠고 집에 돌아와선 저녁거리로 삶아 놓은 보리쌀을 한줌씩 집어 먹으며 배고픔을 이겼다．
남들은 성적이 나빠서 못가는 고등학교 진학을 스스로 포기해야 하는 아픔조차 사치로 여기게 했던 가난． 결국 나는 열여섯살 어린 나이에 책가방 대신 삽자루를 쥐고 생활전선이라는 거친 바다로 뛰어들어야 했다．
아버지 졸라 경운기 겨우 마련
열여섯살의 어린 나이였지만 산기슭 기슭 널려있는 밭뙈기들과 마을에서 마을로 이어지는 들판은 내 돈벌이의 대상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게농사 ２년의 체험은 반드시 부농의 꿈을 이루고야 말겠다는 나의 의지조차 무색하게 하는 현실이었다．
우선 경운기 한 대만 있으면 농사도 수월하게 능률적으로 짓고 남는 시간엔 다른 돈벌이를 할 수 있을텐데 하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결국 내가 매달릴 곳이란 아버지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우리 형편에 웬 뚱딴지같은 소리냐며 번번이 호통을 치셨다． 그러나 ３년 안에 기필코 논 서마지기는 사겠노라는 나의 굳은 약속과 근면·성실함을 믿으셨던지 ８０년 봄에 농협 융자금을 대출받아 경운기 한 대를 구입해 주셨다．
철공소에서 후륜구동 설치와 적재함 개조까지 하였기 때문에， 경운·정지·농약살포·탈곡 등의 농사대행을 했다． 또 퇴비나 비료 등의 농자재를 나르는 일， 공사장 골재며 각종 화물을 수송하는 일 등 그야말로 돈벌이가 되는 것이면 불철주야를 가리지 않았다．
그런데 그 와중에 뜻밖의 시련이 닥쳤다． 집안의 기둥이신 아버지께서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신 것이다． 나의 고생을 조금이나마 덜어주시려고 미처 피로를 풀 겨를도 없이 일을 하시던 아버지． 가끔 다리가 불편하다고 하셔서 병원에 모시려고 하면 한숨 푹자고 나면 괜찮을거라고 안심시키며 정말 곤하게도 주무시더니 그것이 병의 징후였나 보다． 아버지께서는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간경화｀라는 중병으로 그렇게 허무하게 이승을 하직하셨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를 여읜 슬픔에만 하염없이 잠겨있을 겨를이 없었다． 열아홉 나이에 실질적인 가장이 된 나는 눈앞이 캄캄하였다． 가족의 생계를 비롯한 모든 것이 오직 내게 달려있다는 책임감은 자신을 더욱 혹독한 일중독자로 내몰았다． 되도록 일감을 많이 확보하여야 했기 때문에 인근 면지역은 물론 포항 시내를 중심으로 우리 면과 정반대 쪽에 위치한 동해·대보면까지도 원정을 가야 했다． 원활한 농기계 수송을 위해 교통체증이 없는 한밤중부터 새벽 시간대에 거리이동을 했다． 처음 경운기 한 대로 시작한 영농대행업은 작업 내용에 따른 다양한 농기계를 요구하게 되고 자연히 규모도 늘어났다． 따라서 자금이 모일 때마다 새로운 농기계도 하나씩 사들이게 되어 어느새 트랙터·이앙기·콤바인·바인더 등 웬만한 것은 다 갖추게 되었다．
그때 나는 이미 경운기만 ３회째 새것으로 구입하였다． 농기계조차 주인에 이끌려 밤낮으로 굴러다니게 되니 내용연수를 견디지 못하고 제 수명을 다하기 일쑤여서， 헤아릴 수 없이 수리를 하고 새것으로 교체도 해야 하던 때였다． 아무튼 나는 우리 면 관내에서 가장 많은 농기계를 보유하게 되었다． 그리고 어떤 일이든지 맡기면 자신의 일처럼 마무리해주는 ＇확실한 사람｀으로 농사대행 사업자로서의 발판을 굳히고 있었다．
열아홉에 가장돼 생계 도맡아
하지만 그사이 내 몸은 망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일을 할 수가 없을 정도로 허리가 심하게 아파 병원을 전전했다． 그때마다 의사들은 한결같이 심한 노동으로 허리뼈가 닳았다는 진단을 내렸다． 어릴 적부터 지게에 시달려 똑바로 펴질 못했던 내 어깨는 지금도 한쪽으로 몇 센티쯤 기운다． 몸에 골병이 들도록 일밖에 할 수 없었던 자신의 삶이 버겁고 서글프기는 아마 그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농촌에 정착한 후 １０년 동안은 그렇게 살아왔고， 그 와중에 병역특례 혜택으로 군복무도 면제받았다． 아버지로부터 상속받은 빚이며 수월찮게 사들인 농기계 대금 상환， 대구에서 유학하는 동생 뒷바라지， 나의 도움을 필요로하는 두 형님의 결혼과 생계 지원 등등…， 벌어들이는 것 못지않게 지출도 감당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허리띠를 아무리 졸라매도 가난하기만 했던 예전에 비하면 그것은 명분있는 삶의 보람이었다．
자신의 일만 해도 벅찬 가운데서도 우리 면 ４Ｈ회 활성을 위해 몸사리지 않고 일한 덕분인지 나는 ＇영일군 ４Ｈ연합회｀회장에 당선되었다． ８９년에는 ＇영일군 ４Ｈ경진대회｀에서 ＇크로바 대상｀을 수상케도 되었다． ９０년９월에는 우수 ４Ｈ회원으로 선발되어 경북농촌진흥원에서 추진한 일본·대만·태국 등 동남아 ３개국 농업연수를 다녀오게 되었으며， ９１년에는 ＇경상북도 ４Ｈ 경진대회｀에서 ３４개 시군의 대표로 뽑혀 ＇크로바 영농대상｀을 수상하였다． 또 그동안의 ４Ｈ 활동에 힘입어 드디어 ９１년３월에는 정부의 특별지원을 받는 ＇농민후계자｀로 선정되었으며 오랫동안 꿈꾸어왔던 첨단 기계화농업과 ＇영농대행 센터｀ 운영을 실현하기에 이르렀다．
명실공히 전문 농업경영인으로서 또 사회적 공인으로서 눈코 뜰새 없이 살아오는 동안 내 나이 벌써 서른이 되었다． 나이 서른이면 자신의 인생을 똑바로 세운다는 뜻으로 공자님께서 ＇이립｀이라 하셨던 그 나이련만 나는 아직 가정이란 걸 염두에 둘 겨를도 없이 허겁지겁 살고 있었다． 더구나 농촌 총각들의 결코 쉽지 않은 결혼문제가 영농정착 의욕을 꺾어버리는 가장 큰 요인이요 고민거리고 보면 나라고 예외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부부는 하늘이 맺어주는 인연이라 했던가． 친구의 결혼식에서 사회를 맡은 것이 계기가 되어 한 아가씨를 소개받게 되었고 그녀는 지금 내 아내가 되어있다． 결혼식장에서 사회를 보던 나를 신부 친구가 눈여겨 보았고 곧 맞선 제의를 해왔다． 아내는 경남 창녕이 고향으로 대구에서 경리사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하필 농촌 총각과 결혼하여 농사를 지으며 살고 싶다는 거였다． 결혼이 다 성사되어 가다가도 농촌에 산다는， 농사를 지어야 한다는 이유만으로 번번이 퇴짜를 맞은 경험이 많았다． 때문에 자진해서 자신의 운명을 농촌 총각에게 맡기려는 여성이 진짜 있을까 반신반의도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농촌 실정을 너무나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농촌 생활을 원하는 이유도 분명했다． 농촌생활이 결코 환상이 될 수 없는 현실이련만， 스물네살의 그녀에게 심적 부담이 되기에 충분할 나의 모든 결혼조건조차 다 수용하였다．
위로 형님이 세분이나 계시지만 내가 평생 홀어머니를 봉양해야 하고， 대학에 다니는 동생이며 생계가 어려운 형님네 등 도움을 주고 살아야 할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일년에 아홉차례나 제사를 지내야 하는 것조차 다 받아들이며 시집을 오게 된 아내는， 집이 좁아서 혼수로 장만해 온 장롱이며 가구를 ２년이나 창고에 보관해 두어야 했다． 하지만 아내는 남루한 살림에도 불평 한번 하지 않았다．
“땀흘리기 게을리하지 않을터”
금년 １월 감히 내 인생 ３６년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라고 자처하고 싶은 일을 경험하였다． 기계농협 이사 선거에 최연소로 출마하여 １차 최다득표를 얻어 수석이사로 선출된 것이다． 온통 흙빛으로만 살아 온 외곬인생이었던지라 감회가 새로웠다． 태어날 때부터 익숙하였던 가난을 자신의 힘으로 벗어보려고 한창 남들은 학업에 열중하는 １０대에 이미 책가방 대신 삽을 들고서 인생의 승부를 걸었던 나． 그 끝이 어디인지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서도 묵묵히 씨 뿌리고 땀 흘리며 알뜰히 가꾸어 온 내 인생의 텃밭에 소박한 꽃 한송이가 막 피어난 것 같았다． 하지만 그 꽃은 더욱 부지런한 농부의 손길로 보다 크고 향기로우며 더욱 아름다운 꽃을 피워보라고 부추기는 철이른 꽃인지도 모른다．
갓 서른을 넘긴 애송이를 대의원으로 또 수석이사로 세워준 것은 결코 자만하지도 말고 굵은 손마디를 만들어준 삽자루를 내려놓지도 말라는 조합원과 농민들의 당부이리라． 그렇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눈과 마음으로 지켜보고 힘이 되어주셨던 많은 분들의 은혜와 믿음을 결코 저버릴 수는 없다． 나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땀 흘리기를 게을리하지 않을 것이며 농업과 농촌발전에 한 줌 밑거름이 되는 늘 푸른 ＇하늘바라기｀로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