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의 신선함은 하늘과 모과나무가지의 뒷동산 대나무숲에 그득하다. 장독대 옆 매화나무가지의 꽃망울이 톡 터지면서 금방이라도 꽃이 피어날 듯하다. 잔잔한 행복이 가슴속에 퍼져나옴을 느낀다. 이토록 행복한 아침이면 어려웠던 지난일이 생각나 슬며시 웃음짓곤 한다. 경기도 부천에서 태어나 농부의 아내가 된지도 7년이 흘렀다. 85, 86년 소값파동으로 많은 손해를 보고서 밤이 새도록 울기도 했고, 가계부를 정리하면서 생활비에도 못미치는 수입이 기가 막혀서 농사짓기가 싫어지던 순간도 많았다.
시골에서 고생하는 둘째딸 걱정으로 잠못이루시는 대전의 친정어머니와 언니들로부터는 좋은 장소만 나면 음식장사라도 해보라는 전화가 가끔씩 왔다. 그때마다 도시에 나가서 장사하면 금방이라도 부자가 될듯한 흥분으로 잠못이루며 아직은 두아이들이 어리니까 조금만 더 크면 두팔 걷어붙이고 장사를 해야지 하고 다짐해 보고 했다.
꾸밈없는 솔직함과 난(蘭)을 정성껏 보살피고 사랑하는 남편의 모습이 마음에 들어 평생을 함께 하기로 결심하고 살기 시작한 군유산 골짜기 우리마을은 교통도 불편하고 가구당 2천평 정도의 벼농사를 주로 하는 소규모 농업으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가난한 산골마을이었다.
처녀때 대전에 있는 한 백화점에서 수공예품점을 경영하던 나로서는 구름위에 떠다니다 땅에 내려온듯한 변화였다. 그러나 아스팔트 위에서와 아파트에서는 느껴보지 못했던 목단?작약?백합?양달개비?국화 등이 피고지는 화단을 가꾸는 즐거움이며, 하루일을 마친뒤 남편이 운전하는 경운기에 타고 돌아오는 귀가길의 저녁노을이 주는 행복은 도시에서는 느껴보지 못했던 삶의 소중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어릴적부터 성격이 적극적이라서 중고교 시절에는 청소년적십자봉사단장을 하기도 했고, 항상 친구들이 많았고, 남의 나쁜점보다는 좋은점을 먼저 발견해냈고, 밑지는 짓을 잘해서 얻은 「꺼벙이」였던 내가 다시 한번 남들이 힘들고 어렵다고 떠나가는 산과 들 그리고 흙을 지키는 「꺼벙이」가 되어 보리라 결심하게 되었다.
87년 작은 일에서부터 농촌생활에 적응해나가기 위해, 또 용돈과 생활비에 보태고자 꽃바구니·편지꽂이등 실내장식 등공예품 12가지를 만들어서 시외버스터미널에서 가까운 광주시내 조화도매상가에 찾아갔다.
「서울이나 부산등지에서 주문해다 판매하는 바구니를 제가 대신 만들어다 드릴테니 같은 값이면 고향사람에게 수입을 늘려주는게 어떠냐」는 내 말이 그럴듯해서인지 서울에서 새로운 작품이 나오면 견본만 사오고 제품은 나에게 주문해줄 정도로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혼자서는 주문량이 많아 동네사람들에게 기술지도를 해 같이 만들어 파니, 여러사람이 등공예 부업으로 짭짤한 농외소득을 올리게 되었다.
2년째 접어들면서 용환?귀환 두아들의 우유값?간식비, 전화세 등을 걱정없이 해결하고, 손불농협 적금통장, 교육보험통장, 연금등 매달 20만7천원씩 저축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나 시련은 예고도 없이 다가왔다. 88, 89년 중국산 바구니와 공예품이 싼가격으로 물밀듯이 들어와 온통 중국산 제품이 국내시장을 점유하기 시작했다. 매달 꾸준히 들어오던 등바구니 수입은 줄어들었다. 게다가 키우던 젖소 네 마리중 두 마리가 새끼가 들지 않아 싼값으로 팔아버렸다.
89년 가을 소막을 고치고 송아지를 사서 다시 시작해야겠다고 계획하고 있는데 한 마리당 30만~40만원하던 송아지값이 보름사이에 70만~80만원하더니 1백만원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너무 비싸서 송아지를 사질 못하고 망설이고 있는데 막내 시누이가 갑자기 선을 보더니 보름만에 혼례식을 치르게 되었다.
시아버지 안 계시고, 모시고 사는 시어머니도 밭 1천5백평이 전재산인 어려운 처지라 우리 내외가 뒷바라지를 해주다보니 예산에도 없는 3백만원을 쓰게 되어 계획했던 송아지를 사올 수 없게 되었다.
가을걷이를 해보니 20마지기가 전부 남의 논이라서 임대료를 제하고 농약값·비료값을 갚고나니 나락 여덟섬이 남았다. 이것저것 생각하니 속이 허전해 그다지 춥지 않은 날씨인데도 항상 으슬으슬 춥고 밥을 먹었는데도 배가 고픈듯하고 힘이 없었다. 부모에게 물려받은 재산은 없어도 남에게 빌린돈 없고 건강하니 감사하며 불평 없이 시골생활을 이겨내 왔는데, 생활이 쪼들리기 시작하자 남편의 신경질이 늘고 농협에 갚을 돈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남의 돈 20여마지기 농사로는 도저히 생활비도 되어주질 않아 걱정으로 겨울을 맞이했다. 경제적으로 어려워지기 시작하니 생활하기도 힘이 드는데다가 남편마저 시골에 정착하려는 용기와 희망을 잃고 좌절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나 또한 남편에게 바가지를 긁고 아이들에겐 잔소리만 하게 되고 용기와 희망을 잃고 실의의 나날을 보냈다. 먹고 살기가 어렵게 되자 「공기맑은 자연속에서 생활하니 얼마나 좋은가」하는 위로도 시들해지고 농촌이 진절머리 나도록 싫어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마음을 새롭게 하고 우리가정에 변화를 주어야겠다는 생각에서 오랫동안 찾아뵙지 못했던 친정부모님과 언니·동생들을 만나러 아이들을 데리고 대전으로 향했다. 친정식구들은 어렵게 살고 있는 내 형편을 눈치채고 할일을 마련해줄테니 가까운데로 이사오든지, 일본에 사는 이모님의 불고기집이 잘되어 친척을 찾고 있으니 일본으로 가서 장사를 도와드리든지 하라고 의견이 분분했다.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속에서 곰곰 생각해보았다. 과연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어릴때부터 뛰어났던 그림솜씨와 전국규모 대회에서 여러번 상을 받았던 공예솜씨를 살려서 수입개방 물결에 이겨낼 수 있는 공예품을 개발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높은 가격을 받을수 있게 상품의 고급화에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실의에 빠진 남편의 분재와 난에 대한 식견을 뒷받침해주고 어려울 때일수록 따뜻한 사랑으로 감싸 용기를 주어야겠다고 다짐하고나니, 도시로 향한 모든 유혹을 물리칠수가 있었다.
90년 가을 그동안 뜸했던 등바구니 만들기를 다시 시작해 고급품을 만들기 위한 3년 계획을 세웠다. 우선 기술을 보급하기 위해 무료강습을 시작해 집으로 찾아오는 사람은 언제나 환영했고, 시간이 날때는 손불면내 부락마다 순회하며 무료강습을 했다.
어느날은 신기부락 아주머니들이 등공예를 배우러왔다가 점심때가 되어서 식사를 함께하고 있는데, 시어머니께서 쌀뒤주를 열어보시고는 모두들 들으라고 『없는 집에서 쌀굴릴 생각만 한다』고 나무라시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돌아간 신기부락 아주머니들이 다음에 올때는 도시락을 들고 오기도 하고 쌀을 싸오기도 했으며 마늘·고추 등 양념거리를 갖다주는 분도 계셨다. 나는 이익이 적더라도 소득과 연결해주기 위해 싼값의 바구니라도 주문 맡아서 나누어주기 시작했다. 동네사람들은 물론 8개 마을에서 2~3명씩 농사일하는 틈틈이 한달에 5만원에서 10만원 정도의 수입을 올리는 주부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자본을 댈 능력이 없어서 여기서 빌려서 저기서 갚고 하면서 마음고생도 많이 하던중 함평군 새마을과에서 새마을소득금고자금 연리 3%짜리를 지원해주셨다.
금액은 2백만원이었지만 나에게는 큰 힘이 되었다. 자금을 주선해주고 신경써주시던 함평군청 사회과 정난희 부녀아동복지계장님께 지금도 감사한 마음으로 지내고 있다.
낮에는 농사일 거두고 진돗개 보살피고, 아이들 빨래, 강습으로 바쁘게 보내면 찾아오는 저녁시간.
아이들 재우고 그때그때 책임량을 정해놓고 바구니 만들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더니 생활비는 남에게 아쉬운 소리 안하고 해결이 되어갔지만 농협돈은 이자만 갚아 나갔다. 수입된 재료도 등바구니 만들기에 한계를 느껴서 왕골바구니쪽의 상품을 개발해야겠다고 방향을 정했다. 우선 돗자리의 고장인 월야 문장에서 종자를 구해다 농촌지도소의 지도로 왕골바구니의 재료가 되는 완초를 손불면에 보급시켜야겠다는 생각으로 우선 1마지기에 시험재배를 하여 거기서 생긴 재료로 방석이나 매트를 만들기 시작했다. 상품만 만들어내면 판로확보와 소비자의 구매욕에는 충족시킬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기기 시작했고, 주문도 들어오기 시작했다.
자본투자가 있어야만 되겠기에 면사무소에 등·완초공예품 새마을부업단지 신청을 했는데 담보물건과 신용능력도 없는데다 남자도 이끌어나가기 어려운 부업단지를 여자가 대표가 되어 활동한다고 비웃는 소리가 동네사람은 물론 서류를 취급하는 담당자 사이에서도 들려왔다. 3년이라는 세월을 투자하여 기술은 확보해놓았으니 빈털터리지만 눈에 안 보이는 두둑한 자산이 있는데 무슨 걱정인가 하는 배짱과 용기로 부업단지로 지정되기만을 기다렸다.
함평군청에서 직접 전화가 왔다.
『김성자씨 축하합니다. 90년도 부업단지로 지정이 되었으니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
눈물이 나올 정도로 반갑고 고마운 소식이었다. 연년생인 두아이를 봐줄 사람이 없어 큰 아이는 손잡고 둘째는 업고 기술지도를 다니면 시어머니께서는 쓸데없는 짓 한다고 꾸지람도 많이했고 조금만 늦게 돌아오면 성질급한 남편에게 가슴이 아플 정도의 불평도 들으면서 억울하지만 참아내야 했던 지난날의 고생을 생각하니 뜨거운 눈물이 소리없이 흘러내렸다.
새마을부업단지로 지정되었으니 이제부터 또 새로운 시작이구나 생각하고 차분하고 빠짐없이 준비를 해나갔다.
우선 다섯가지 기본원칙을 세웠다.
첫째, 아무리 힘들어도 감사히 생각하자.
둘째, 가정일을 소홀히 하지 말자.
셋째, 공동의 이익을 위해 노력하자.
넷째, 건강을 잃지 말자.
다섯째, 공부하고 배우는 자세를 잃지 말자.
모든 노력을 동원해도 안될때는 하늘의 뜻이겠지 하고 순응할 생각을 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길을 걷는 시간도 아까워서 빨리 걸을 정도로 항상 분주한 나날이었다. 바구니 만드는 법을 가르치러 다니면서 많은 농촌주부들을 상대로 대화를 하다보니 힘을 모아서 농촌의 문제점을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손불면내 주로 젊은 주부들인 24명으로 90년 3월1일「들꽃회」가 탄생되었다. 주요활동은 농산물 직거래를 위한 준비와 농촌지역주민의 교양을 높이기 위한 독서회로 출발하였다.
들꽃회원들이 이끌어나가는 「들꽃문고」는 내가 생각하던 책 2백여권으로 시작해서 1년이 지난 91년 3월 현재 7백36권의 신간서적이 비치되어 있는 2개의 책장을 갖춘 문고가 되었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군새마을문고의 3백권 지원과, 회원들이 고무장갑을 팔아 만든 돈, 함평읍내에서 개최한 농산물직거래 바자회에서 생긴 이익금, 전남도여성회관에서 보내온 독서회지원금 25만원 등으로 이루어진 결실이었다. 들꽃회원들이 책배달부가 되어 매달 20~30만원씩 나누어주고 거두어 들이는 일을 담당하고 있으며 90년 2월에는 일을 담당하고 있으며 90년 2월에는 회원 전원이 농촌지도소의 농촌지도자로 가입하였다.
들꽃회원들은 메주를 계약주문받아 광주와 함평읍내로 직거래하기 시작했다. 회원들의 정성이 담긴 「들꽃메주」로 90년 1백50만원의 소득을 올렸다.
도에서 주관하는 설·대보름맞이 농산물 임시직매장에도 들꽃회원들이 정성껏 만든 청국장·콩가루·가래떡·강정·결명자 등을 판매해 5일간 3백만원 매출액에 50만원의 이익을 남겼다. 회원들이 한자리에 자주 모이기 힘들기 때문에 매달 손으로 써서 만드는 「들꽃회보」를 만들어서 회원들에게 돌리기 시작해 이제 10호가 되었다. 비록 시 한수와 알리는 말씀, 회장인 내가 쓰는 칼럼 한 장으로 만들어지는 네면짜리 회보이지만 우리들을 이어주는 끈끈한 다리구실을 해주고 있다.
어려움속에서도 공예품 주문은 늘어나기 시작했고 남편이 농민후계자로 지정되었으며, 실의의 늪에서 헤어나 희망과 용기를 다시 갖게 되었다.
아이들은 모두 「손불어린이집」에 다니게 되어 아침 8시30분에 나가서 오후 4시에 돌아오니 활동하기가 훨씬 좋아졌다. 1년간 우리 「들꽃회」를 지켜봐주시던 나내균 면장님, 정진오 군수님, 손동용 새마을과장님의 도움으로 7명의 들꽃회원들이 참여하여 메주와 청국장을 전문으로 만드는 「들꽃식품」을 탄생시켰다. 1인당 3백만원씩 투자하여 공동관리체제로 출발한 메주만들기 사업은 그동안의 경험을 살려서 재래식 전통메주를 고집하며, 단체급식소·백화점·농산물직판장·식당 등의 계약주문으로 올해 매출액 2천만원을 목표로 하고 있다. 정성껏 만드는 식품제조야말로 농촌주부인 우리들의 몫이라는 생각으로 회원을 모으고 회장을 맡아 이끌어온 지난 한해동안의 노력으로 「들꽃메주」를 탄생시킨 것이다. 회원들의 적극성과 회장을 도와주며 용기를 북돋아주던 따뜻한 마음씨에 감사할 뿐이다. 처음에는 쓸때없는 짓 한다고 못마땅해 하시던 시어머님께서도 내편이 되어주셨고 남편도 호응해주기 시작했으며 비웃던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언제 또 어려움이 닥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뒷걸음치지 않고 달려나갈 생각이다. 평범한 농부의 아내였던 내가 몇 년 사이에 농촌의 여성운동가가 된 느낌이다. 적극적 사고와 희망을 잃지 않는 마음가짐이 주는 선물은 얼마나 큰지 오늘도 감사하며 들꽃으로서의 소박한 아름다움을 가꾸어 나가리라.
  [최종편집 : 1991/0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