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고장은 들이 넓고 도로가 비교적 잘 정배돼 있어 농사짓기엔 좋은 곳이다. 그러나 벼농사 위주의 단순농업에 경작면적이 좁아 몇 년전까지만 해도 소득이 가장 적은 마을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나는 이곳에서 태어나자랐고 농사를 지었다. 이제 40대로 접어든 인생길에서 결코 짧지만은 않았던 지난날들을 가만히 돌이켜보니 감회가 새롭다. 참으로 바쁘게 뛰어온 지난날이었다. 아직도 이루어야 할 일들이 산적해 있지만 지금까지의 삶을 기록하려 생각하니 가슴이 뛴다. 농촌생활의 고생담은 누구나 비슷한 것이기에 나는 농민후계자로 선정된 때부터 수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2천평도 안되는 논에 벼농사만으로 영농에 종사하던 나는 86년 2월 영농후계자 자금을 경종으로 받아 우여곡절 끝에 사체를 빌리고 하여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사과과수원 1천여평을 구입하였다. 전정을 어떻게 하는지, 농약살포는 언제 하는지도 모르고 구입한 과수원에서 사과꽃이 피고 벌·나비가 날아들 때 나는 금방 부자가 된듯한 느낌이었고 황홀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사과가 콩알만큼 자라 적과 시기가 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사과에 대한 지식이 완전 백지상태나 다름없어 이웃 과수농가에 적과방법을 물었더니 일일이 손으로 재서 한뼘 간격으로 한송아리 중에서 제일 좋은 것으로 1개씩만 달아두면 된다고 하여 그저 그렇게 하였다. 사과가 하루가 다르게 굵어져 가는 것을 느낄 무렵에 장마가 다가왔다. 거센 비바람에 큰 가지고 찢어지고 어떤 나무는 송두리째 쓰러졌다. 그때서야 사과를 너무 많이 달아서 다른 집의 과수원보다 피해가 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래도 땅에 떨어진 사과만 아까웠지 나무에 달린 사과를 더 솎아줄 생각은 하지 못하였다. 점차 서늘한 바람이 불고 가을이 왔는데도 우리 사과는 남들 사과처럼 굵지도 않고 시퍼런채 익을 줄을 몰랐다. 평소에 근처의 몇군데 과원에 가서 기술 문의를 하여 보면 거의가 기술의 본질은 깊이 숨겨둔채 그저 아리송한 대답으로 일관하던 분들이 조소하는 의미를 담은 말씨로 『자네 대추농사 잘 지었더구먼』하였다. 한때는 고추농사에 나름대로 일가견이 있어서 「고추박사」라는 칭호도 들었었는데 일년생 작물과 달라 사과는 다년생 작물이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허망한 마음으로 수확기가 되어 사과를 따보니 대다수가 15kg상자에 70개 내지 80개가 들어가는 보잘것없는 하품이었다. 이래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어 가을걷이를 끝내고 농촌진흥청 기술지도교육을 신청해서 1주일간 사과재배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내겐 너무나도 기초적인 지식도 없었던 탓에 마치 유치원생이 대학강의를 듣는 것처럼 한결같이 어렵고 생소하기만 하였다. 그런 주제에 집에 돌아와서 책을 읽어가며 그해 겨울 사과 전정을 내손으로 직접 하였다. 설마 태어날 때부터 기술을 배워가지고 세상에 나온 사람이 있으라 하면서. 이렇게 이듬해 농사는 시작됐고 첫해의 쓰라린 경험으로 이제 적과하는 방법은 어느정도 터득하게 되었다. 처음 1년은 사과부란병도 모르고 조피작업도 할줄 몰라 방치했다가 나중에 알고나서 거친 껍질을 벗겨보니 군데군데 큼직큼직한 부란병이 생겨 있었고 몇 나무는 아예 밑둥치에서 베어 버려야 하는 아픔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장마가 끝나자마자 조기낙엽이 되어 거의 80% 이상이 사과 열매만 덩그렇게 매달리고 말았다. 점방이응애가 심하게 발생한 데다가 갈반병까지 합세를 하여 그렇게 망쳐놓고 만 것이었다. 모르니까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변명하기에는 너무나도 현실이 서글펐다. 거듭 2년을 실농하고 나니 사과밭 구입할 때 빌린 사채도 갚을 길이 막연한데 하루는 친구가 찾아와서 이번에 중장기자금으로 사과 저장고 짓는 정부융자금이 나오는데 지어보겠느냐며 기회는 그리 흔하지 않다고 귀띔을 해주었다. 그리하여 그해 10월 저장할 사과도 없는데 빚을 또 지고 15평짜리 저장고를 신축하였다. 이렇게 실속없는 농사를 지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농민신문 광고란을 통해 농협대학 부설로 경북연수원에서 새농민기술대학 사과과정 교육이 있다는 것을 보고 농협에 신청하였더니 다행히도 추천이 되어 수강생 1백명중의 한사람으로 열심히 강의를 듣고 질문도 여러번 하였는데 전해 교육 때와는 달리 머리에 와닿는 것이 매우 많았다. 연수원 교육을 마치고 동료 몇사람과 돌아오는 차 안에서 집에 돌아가는대로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임을 만들어서 농사기술도 익히고 지은 농작물도 함께 판매하는 작목반을 구성하자고 굳게 다짐했다. 우리는 같은 생활권이면서도 4~6km의 거리로 산재한 자영업자들이었는데 내가 회장을 맡고, 가능하면 연령층이 비슷하고 과원면적이 1만평이하여야 한다는 등의 몇가지 규약을 만들었으며 주덕농협과 주덕농산물의 이름을 본떠 「주농회」라는 명칭까지 붙였다. 회원수도 ·12명으로 제한했는데 그 정도면 상호간의 인화단결과 전정이나 적과, 봉지씌우기 등의 작업을 품앗이로 할 수 있는 이점이 있기 때문이고 선진지 견학을 할 때도 소형버스 정원에 맞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차근차근 한달에 한번씩 돌아가며 회원의 과원에서 세미나 형식으로 모임을 몇차례 가져봤으나 우리 회원 중에는 남달리 사과농사를 잘 하는 사람도 없었고 판로 개척에 앞서가는 사람도 없었다. 토의 끝에 우리보다 앞서가는 독농가의 과수원을 직접 견학하기로 하고 그 일을 추진하다 보니 두가지 문제점이 생겼다. 첫째는 가야 할 장소였고 둘째는 언제쯤이 좋을지 시기를 정하는게 쉽지 않았다. 그동안 몇차례 서울 가락동시장에 출하를 해본 경험에 비추어 보편적으로 좋은 시세를 받는 농가의 농사방법을 배우기로 하고 시기는 우리가 가장 바쁜 시기에 상대방도 바쁠 것이기 때문에 견학지의 독농가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일하는 현장을 배우기 위해 일부러 바쁠 때를 택하여 1년에 두세번씩 경북 청송과 충남 예산, 서울 가락동시장까지, 어떤때는 부부동반으로 찾아나섰다. 그럴 때는 아내에게까지 농사일을 가르쳐주러 원정을 다녀야 하나 하고 쑥쓰러운 생각도 들었지만 아내의 보다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를 보며 지금 농촌 실정에 비추어 한편으론 감사하고 한편으론 여간 미안하지가 않았다. 그러는 가운데 농촌진흥청에 가서 1주일간 사과재배에 대해 재교육을 받기도 하고 원예조합에서 교육이 있을 때면 꼭 참석을 했다. 이렇게 가는 곳마다 조금씩 다른 농사기법을 배워서 이를 종합하다 보니 우리의 현실에 맞는 농사방법을 터득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산 넘고 물 건너」라는 말처럼 어느정도 농사를 지어놓고 나니 판로가 가장 큰 문제로 대두되었다. 회원은 불과 십여명이고 한달 회비라야 1인당 3천원밖에 안되는데 그나마 여러차례 선진지 견학을 하는 비용으로 다 사용해서 사실상 모아진 기금이라곤 없었다. 그래도 우리는 판로를 개척하고 우리의 상표를 제도시장에 정착시키기 위해 반드시 우리가 만든 포장재가 있어야 한다는데 인식을 함께 했다. 지금부터 3~4년 전만 해도 농산물 수입개방 예시품목이라는 용어는 있었어도 지금처럼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이라는 가슴을 쓰리게 하는 용어는 없었다. 이날이 이렇게 빨리 올줄 알았다면 진작에 좀더 서두를걸 하는 생각을 하면서 아무튼 우리는 그때부터 수입개방에 대응하기 위해 우리가 생산한 농산물의 완전한 상품화를 제일의 목표로 삼았다. 상자공장에 의뢰해보니 최소한의 생산단위가 처음 주문시에는 5천개라고 하며 줄잡아도 2백만원이 되었는데 시기적으로 아우리 햇사과가 조금씩 나오기 시작할 무렵이라 그만한 돈도 없고 그렇게 많은 양의 상자도 필요없고 그저 1천개 정도만 있으면 되었다. 다행히 상자공장에서 우리의 어려운 처지를 십분 이해하여 처음 주문량을 2천개로 하고 대금도 가을사과가 나오면 갚도록 해주었다. 그날부터 나는 몇날며칠을 상자에 새길 디자인을 도안하였고 얼마후 제품이 나왔을 때는 애쓴 만큼의 보람도 있었다. 이때만 해도 사과포장 작업을 할 때 왕겨를 사용하는 농가가 많았으나 우리는 상품의 질을 높이기 위해 스티로폼을 사용했고 마무리도 밴딩 대신 테이프로 간결하게 했다. 선과기가 없어 눈으로 선별하다 보니 크기를 일정하게 추려내지 못하였으나 가락시장의 경락단가는 비교적 좋았다. 그후 우리는 선별의 효율을 높이기 위한 연구 끝에 1kg짜리 손저울을 구입해 눈금을 표시하기를 5백g, 3백75g, 3백g, 2백50g으로 나눠놓고 선별을 해본 결과 처음엔 서툴러서 비능률적인 것 같았으나 손에 익숙해진 후 손저울을 두세개 놓고 하였더니 선과기 못지않게 많은 양을 선별할 수 있었다. 이렇게 크기별로 1차 선별이 끝나면 상자에 담기 전에 2차로 색깔이나 긁힘 정도에 따라 다시 등급을 다섯으로 구분하였다. 좋은 과일을 생산하기 위해 노력한 것 못지않게 신용있는 상품을 만들기 위해 정성을 들였더니 시장에서 우리 주농회의 「주농사과」는 차츰 인정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럴 때쯤 우리는 시장에 더욱 확실한 상표를 심기 위하여 법인인 청과주식회사와 주농회간의 출하약정을 체결하였다. 그런 후에 우리는 이름이 알려진만큼 내가 생산한 상품에 대한 책임이 뒤따른다는 것을 항상 생각하면서 소비자에게 신용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그 결과 신정대목에는 시장에서 최고의 가격으로 경매되기도 하였다. 이러는 가운데 나 개인적으로 3년동안 어렵게 모아왔던 농어가 목돈마련저축을 찾게 되어 89년 농사에서 얻은 수입금 모두와 합해 1천2백여평되는 농지를 새로 구입하게 되었고 거기에다 후자와 아오리 묘목을 정성들여 심었다. 이제 여기에다 지금까지 내가 배우고 익혀서 준비해온 모든 정열을 쏟아 훗날 누가 보아도 자랑스러울만큼 훌륭한 과원으로 만들어갈 계획이다. 앞서도 말했듯이 다달이 각출하는 정기회비만으로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자금을 쉽게 충당할수가 없었다. 초창기에는 특별회비를 거두기도 했고 상자공장에서 상자 구입시에 할인받은 전액을 기금에 포함시키기도 하였다. 또 사과 운송과정에서 개인이 소형 화물차를 사용할 경우 한상자당 운임이 3백50원인 것을 공동으로 대형 화물차를 이용하여 2백50원씩으로 낮추고 남는 차액 한상자당 1백원씩을 공동기금에 적립시켰고 공동작업시에 발생하는 이익금을 모두 포함시키기도 하였으며 청과회사와 출하약정 후 우리가 출하하는 물품에 대해 1%의 출하장려금을 지원받기도 하였다. 이렇게 알뜰살뜰 모은 기금이 이제 겨우 2백여만원. 우선은 이것만으로도 상자 구입시 다급한 돈은 어느정도 해결하게 되었다. 그러나 상자 1만개는 확보할 비용을 마련해야 하므로 금년내에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공동기금을 5백만원 정도 모으는 것을 우리의 모임에서 가장 중요한 목표로 정하고 있다. 이제 주농회는 초기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안정적인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시장에선 주농회가 출하한 사과의 인기가 높고 주농회에 가입하고 싶어하는 인근의 과수재배농가도 많다. 주농회의 오늘이 있기까지 모든 회원이 노력했지만 특히 이석정 총무의 노력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이총무는 별도의 수고비가 있는 것도 아닌데 주농회의 살림과 온갖 궂은 일들을 처리하며 헌신봉사해오고 있는 것이다. 이석정 총무의 희생은 우리 회원들에게 「너와 내가 하나로」라는 희식을 심어주었다. 지금 나의 작은 힘으로는 주농작목반 한 모임에만 충실하기도 어려운데 주덕농협 관내 12개 작목반에서 나를 그들의 대표로 작목반 총회장 자리에 앉혀 주었다. 사람이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가정에 신경써야 할 시간이 좀더 있어야 하는데, 거의 그림자처럼 작업을 함께 하다가 어두워지면 그제서야 주부로 돌아가야 하는 아내엑 미안한 마음뿐이다. 밥 짓는 것은 물론 청소에 빨래까지 담당하는 막내(국민학생)에게도 미안하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주위으 많은 분들로부터 도움을 받아왔듯이 이젠 나도 그들을 위해 땀을 흘리고 싶다. 한톨 밀알의 푸른 꿈을 심는 모든 이에게 부끄럼 없는 사랑을 나눠드리고 싶다.   [최종편집 : 1991/0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