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고통은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한 하나의 과정이고, 행복의 실상도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족을 느끼며 살아가는 내마음 한가운데 있다는 자각을 하기까지 37년간 몇백번의 시련과 좌절의 구렁텅이 속에서 뒹굴었는지 모른다.
나는 1952년 10월 1일 지금은 충주댐으로 수몰된 청풍에서 3남1녀의 장녀로 태어났다.
제천에서 한강을 옆으로 끼고 50리가량 들어가 있는 밤나무 우거진 산등성 아래의 평화로운 시골마을은, 새벽녘 동트기도 전에 친구들과 알밤을 줍고 명절때면 때때옷 입고 윷놀이?널뛰기?그네를 타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 서린 곳이다.
부모님과 이웃의 귀여움과 친구들의 부러움을 사며 자라던 행복한 시절도 잠시, 아홉 살 되던 해 어머니를 여의고나서부터는 모든 상황이 뒤바뀌었고 어린 손자 손녀들을 보며 늘 가슴아파하시던 할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귀염둥이가 천덕꾸러기 된다더니 너희들을 두고 하는 소리구나.』
돌이켜보면 그때부터 파란만장한 나의 삶이 예고됐던 듯 싶다.
『여자는 공부해보았자 남의 집에 가서 좋은 일만 시킬 뿐이다. 집에서 살림이나 배워라』는 어른들 말씀에 아무말도 못하고 따라야만했던 시절, 어찌나 공부가 하고 싶었던지 세살위인 삼촌을 졸라 새엄마 몰라 공부하면서 차라리 한끼 죽을 먹고 살망정 친부모님 밑에서 자랐으면 하는 생각에 몸부림쳤다.
세월은 흘러 74년12월. 함박눈이 펑펑 쏟아져 내리던 날, 기대에 부푼 가슴을 안고 지금 살고 있는 경북 봉화읍 해저마을로 시집을 갔다.
신랑은 농가의 5남2녀중 장남으로 갓 제대하여 취직시험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남편은 매번 낙방의 고배를 마셨고 그러던 중에 나는 첫딸을 낳았다.
종갓집 맏며느리가 되어 「아들 못낳은 죄」로 시부모의 따가운 눈총을 기꺼이 감수해야 했을 뿐 아니라, 분가는 엄두도 못내고 부엌일에다 농사일까지 하려니 힘겨워 눈물이 났다.
캄캄한 새벽에 일어나 방위병으로 근무하는 시동생의 아침밥을 지을때면 차시간은 다가와 마음은 조급해지는데, 땔감인 아카시아나무는 아무리 불을 붙여도 붙지 않고 나무대로 고집을 부려 나무를 부둥켜안고 운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시동생들 도시락만 해도 다섯 개를 싸야하고 아침밥짓기를 두 번, 시아버님 독상을 비롯해 네 번의 아침상을 차려야 하고 점심·저녁은 시동생들 돌아오는대로 다섯 번이고 여섯 번이고 대중없이 차려야 했으므로 매일을 큰일 치르는 집 같아 나는 부엌에서 헤어날 시간이 없었다.
『당신 혹시 무슨 지병 같은 것 갖고 있는게 아니오? 매일 그렇게 코피를 쏟는걸 보니….』
남편조차 따뜻한 위로의 말 한마디 할줄 모르고 나의 힘겨움을 아랑곳 하지 않으니 밥상을 차리다 말고도 박복한 신세에 설움이 절로 복받쳐 『이러려고 처녀 가슴이 그리도 부풀었었나』하고 탄식도 했지만 형편이 나아질리는 만무였다. 게다가 은근히 기대를 걸었던 남편의 취직도 뜻대로 되지 않아 친정동생들을 돌보리라는 생각은 꿈에서조차 펼 수 없는 신세가 되니 결혼전의 모든 희망은 점점 퇴색해져갔다.
5일장이 서는 봉화읍내로 오이며 토마토·호박 등을 리어카에 싣고 비포장도로를 따라 한시간동안 끌고 나가 팔아봐야 보름도 못먹는 혼합곡 한 포대, 1백g짜리 조미료 한 봉지, 2홉들이 콩기름 한 병을 사고나면 더 살 것도 없는 감질나는 생활이 계속됐다.
여름과 겨울엔 그나마 거둔 농산물을 팔아 끼니를 때우기가 쉬웠지만 이른봄엔 밀 섞인 혼합곡을 먹어야 했다.
모든 것이 없기 시작하니 심지어 간장·김치·시래기조차 떨어져 이웃에서 꾸어다 먹어야 할 형편이니 대식구의 끼니를 감당해 내기가 어려웠다.
잡을 짓다 말고 찬거리를 구하러 뒷산으로 냉이·산나물을 캐러가는 일은 예사였다.
논밭이 조금이라도 있었으면 좋으련만 남의 농토를 빌려 짓는 농사도 비료·농약·종자값 등을 제하고 나면 네 시동생의 학비와 열식구 생활비조차 턱없이 모라잤다.
토지를 얻어 짓거나 날품을 팔아 일해봐야 빚은커녕 이자도 갚지 못해 새로 빚을 내 이자를 갚고 살림에 쪼개쓰는 생활이 몇 년째 계속되니 하루하루가 짜증스럽고 답답하기만 했다.
그럴수록 양말 한 켤레 못사주는 남편이 야속하게만 여겨져 말다툼이 잦아지고 이불을 덮어쓰고 눈물로 지새우는 날이 늘어갔다.
『여보, 막대기 하나 찌를 땅뙈기도 없이는 고생만 했지 돈 한푼 못 벌테니 도회지로 나가 무슨 일이든 해봅니다.』
『아무것도 없이 도회지로 가서 무슨 일을 한단 말이오. 더구나 이 집은 어떻게 하고….』
『돈 벌면 빚도 갚고 전답도 마련할 수 있을 테니 그때 다시 부모님 모시면 되지 않아요.』
『정 그러면 광산으로 가봅시다. 별다른 기술없이도 할 수 있다니….』
수차례 조르고 사정한 끝에 77년 초 여름, 이삿짐을 꾸릴 것도 없이 옷가지 몇 개와 어린딸을 등에 업고 강원도 장성땅에 도착했다. 그러나 탄광이 어떤곳인지 모르지만 힘겨운 시집살이에서 해방된다는 기대감과 악착같이 돈을 보야야겠다는 각오는 6개월만에 무너졌다.
두달씩 미루어 지불된 임금으로 처음엔 방세며 생활비, 심지어 남편의 작업복?장화까지 외상으로 샀다. 그나마 임시부라서 월급도 선산부(숙련공)의 절반도 안되었으므로 월급봉투만 쳐다보고 살 수 없어 아이들 등에 업고 수출품 뜨개질이며 연탄배달도 해가며 억척스레 탄광생활에 익어갈 즈음, 남편이 일하고 있는 갱내 막장이 무너지는 사고가 잦아졌다.
하루가 멀다하고 일어나는 갱내 사고에 만약 남편에게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면 어쩌나 조바심을 치던 때라 봉화집으로 되돌아가자는 남편을 끝까지 말릴 수는 없었다.
조금만 더 참으면 구멍가게라도 차릴 수 있겠다는 기대와 계획을 무참히 꺾은채 시댁으로 돌아온 후 둘째 아이를 낳았다. 또 딸이었다. 시부모님과 남편을 볼 낯이 없었다.
딸이라고 1년이 넘도록 출생신고도 안할 정도였는데, 3년 후 첫아들을 낳고서야 웃는 낯으로 대하며 부엌일도 거들어 주었다. 그전에는 하루하루가 서글프고 고달프더니 당당히 시집식구로 인정해줘서 그런지 자식을 위해 땅 한평이라도 만들어야겠다는 각오가 생겨났다.
버려진 산비탈 땅을 헐값이 사서 쟁기질을 하고 돌을 주어내고 거름을 주니 제법 밭 같은 모양이 났다. 그 즐거움에 손 마디마디 굳은 살이 박히고 손가락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일을 해도 고된줄을 몰랐고 밭을 일구어 배추를 심고 정성껏 가꾸었다.
대풍이었다.
그러나 막상 추수무렵에 가니 시세가 떨어져 장에 내다 팔아봐야 운임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도지를 내어 지은 벼농사 마저 냉해로 인해 추수도 못하고 논바닥에 버려둔 실정이었으니 아무리 마음을 굳게 먹으려고 해도 밀려오는 좌절감을 막을수가 없었다.
방법을 강구하던 끝에 역시 도회지로 나가 돈을 벌어야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친정이 있는 제천으로 갔다. 그때부터 한달 월급 10만원도 안되는 제과점일도 몇 달하다가 남편은 산판일을 따라나섰고 나는 보따리 김장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산판일도 일년내내 있는 일거리가 아니어서 80년도엔 경기도 이천으로 이사해 남편은 조그만 철공소에 취직을 했고 나는 항상 행상을 계속했다.
월급이래야 쥐꼬리만 했지만 땅을 마련할 욕심에 12만원중 10만원을 저축하고 날품판 것은 생활비로 근근이 보태 나가기를 1년쯤 너무도 각박한 생활이었기에 1년간 적금 부은 것 1백50만원을 타던 날 기쁨에 넘쳐 소리쳤다.
『티끌모아 태산이라더니 이제 조금만 더 고생하면 빚 갚고 논밭도 마련할 수 있겠지요? 여보!』
『이제 그만 고향집으로 갑시다. 여기선 도대체 살아가는 낙을 못찾겠소.』
『아니 돈없고 기술없이 어딜가면 호강하겠어요. 고생끝에 낙이 온다는데 어디서든 고비를 넘기지 못하는 당신 때문에 지금껏 땅 한뼘없이 이 고생 아녜요.』
『맘대로 생각해. 나 혼자라도 갈테니.』
이리하여 몇해만에 돌아온 고향은 처음 시집와 그토록 고생하던 곳이 아니었다. 고향은 역시 따뜻한 품으로 우리식구들을 맞아 주었다.
81년 봄, 우리는 객지를 떠돌며 모은 돈으로 땅을 조금 사서 비닐하우스를 짓고 고추모종을 심어 팔았다. 여름에는 고추모종이 끝난 자리에 열무를 심어 열무를 거둔 다음엔 파를 심어 가을에 팔고 뒤이어 상추를 심어 일년내내 한시도 땅을 놀리지 않았다. 적은 땅으로도 생각보다 많은 수확을 볼 수 있었다.
한번 성공을 거두니 농사일에 재미도 붙고 시동생들도 거의 학교를 졸업하게 되어 생활비도 적게 들었으므로 새로운 힘이 났다. 게다가 농협에서 영농자금을 대출해 주어 이자가 비싼 사채를 안쓰고도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한번 성공을 거울삼아 비닐하우스를 늘리고 고추모종을 주문받아 봄에 재배농가에 팔았다.
고추품종도 대여섯가지로 구분해 우리땅에 어느것이 적합한지 시험해 보면서 토질에 맞는 품종을 선택하고 방안에서 싹을 튀울때 온도조절에 온갖 정성을 다 쏟았다.
봄에 고추모종을 팔고 나면 일년내내 융자를 받지않고도 농사를 지을 수 있음을 알게되니 주먹구구식 농사는 옛말이라는게 실감되었다. 남편은 채소재배에 관한 책을 열심히 읽고 품종, 종자량, 씨 담그는 날, 씨 뿌린날, 비료량, 병해충 이름등 주요한 농사일정을 날씨?기온과 함께 상세히 기록해 나갔다.
그렇게 하기를 2년만에 빚을 모두 갚고도 논밭 3천평을 살 수 있었다. 땅문서를 장롱 깊숙이 넣어두던 날 내가슴은 새색시처럼 울렁거렸고 뿌듯한 기분을 어디에 소리치며 자랑하고 싶었다.
83년 봄엔 처음으로 우리땅에 모내기를 하는 기쁨을 누렸으며 모내기후 돼지고기를 구워놓고 식구들이 둘러앉아 웃음꽃을 피우며 단란한 시간도 가져보았다. 극심한 여름가뭄에 벼포기가 말라들고 땅이 갈라져 물 때문에 동네싸움까지 있었지만 냇가에 경운기를 대놓고 5백m쯤 되는 농약호스로 밤새도록 물을 품어올려 급한대로 논물을 대고서는 고추밭으로 옮겨 한포기 한포기 정성스레 목을 축여주었다.
그래서인지 그해도 풍작을 거둬 우리는 밭 네마지기를 더 샀고, 동네에서는 우리에게 농사비결을 묻거나 따라하는 집도 늘어났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모든일이 순조롭게 풀려나가 살만하다 싶더니만 86년 9월 남편이 잠을 자다말고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는 재앙이 닥쳤다. 청천벽력도 유분수지, 이렇게 원통하고 어이없는 현실앞에서. 어찌해야할지 아득하고 막연하여 매일을 악몽속에 시달렸다.
아홉 살에 어머니를 잃고 자라면서 가슴에 못이 되어 막혀 있는 「어미없는 자식」이란 말을 다시 「애비없는 자식」으로 물러줘야 하는 어미 입장이 되고보니 슬픈 인생유전의 원통함이 먼저 떠난 남편에 대한 야속함으로까지 번졌다.
그러나 7남매의 맏며느리이자 4남매의 어머니라는 현실은 한숨만 내쉬고 있을 정도로 편안하게 나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슬픔을 잊기 위해서라도 더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고 좌절과 절망의 쳇바퀴를 돌면서 배운 의무감이 나를 일으켜 세웠다.
더구나 아이들이 학교에서 상도 타오고 「애비없는 자식」소리 듣지 않게끔 착실히 공부를 하여 아픈 상처를 메워주고 있으니 언젠가는 새 살이 돋아나리라는 희망이 생겼다. 무엇보다 자식들 앞날을 위한 등불이 되어주리란 각오가 무거운 농약통을 짊어지면서도, 경운기를 끌고 억척스레 논밭을 휘저으면서도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 않게 했다.
동네 사람들은 바쁜 일상속에서도 틈틈이 우리 일을 거들어줘 도회지로 나갔더라면 누가 이런 훈훈한 온정을 베풀어 주었을까 하는 생각에 사는 맛을 느끼게 했다.
87년엔 비닐하우스 18채를 지어 고추농사를 지었는데 풍작에다 시세마저 좋아 잠을 설쳐가며 여름내 고생한 보람을 찾았으며 겨울에 1천5백평의 밭이 더 늘어났다.
땅은 배신하거나 속이는 일이 없어 은혜를 아는 경우 바른 사람과 상통했다. 거름을 듬뿍 주고 자식 돌보듯 정성껏 어루만져 주면 그만큼 풍성하게 열매를 맺었다.
지난해엔 폭우와 산사태 등으로 온갖 안전고투를 거듭했어도 풍작을 만나 큰 시누이 시집보낼 밑천은 장만했다고 기뻐하던차 터무니없는 고추값 폭락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다행히도 참깨 심고 난 빈터에 심은 배추를 김장철에 9백~1천원까지 받았고 농협에서 지원해준 씨앗용 콩을 심어 약 8백평의 밭에서 콩 20가마를 수확, 수매대금 1백10만원으로 고추농사 적자폭을 메꿀 수 있었다.
그걸 보아서라도 앞으로는 놀리는 땅 없이 이것저것 조금씩이나마 부지런히 심고 가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가족의 맏며느리로 들어와 농촌생활과 시집살이에 적응하지 못해 오랜기간 방황했으나 이젠 생활도 안정되고 훌륭히 성장한 시동생들로부터도 도움을 받고 있으니 이보다 더 큰 보람은 없을 듯 싶다.
시집올적 땅 한뼘 없던 것이 논밭합쳐 7천평이나 되고 비닐하우스 18채에 전천후 온상재배도 할 수 있으니 남부러울게 없다.
올해도 고추가 풍작이기를 바라며 87년 고추를 팔아서 산 송아지를 지난해 4마리로 늘렸는데 고추모종이 끝나면 마구간을 더 늘려 10마리쯤 키우고 사과?대추나무도 심어볼까 하는게 올해 꿈이다.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무지개 쫒기가 아니라 자신의 생활에서 만족과 보람을 찾는 것임을 어렴풋이 느끼게 되는 요즘음, 흙과 더불어 고향을 지키고 살면서 연로하신 시부모님 잘 받들고 자식들에게 존경받을 수 있는 어머니로서 열심히 살아갈 것이라 다짐해 본다.
  [최종편집 : 1989/0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