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생활을 시작한지 어느덧 4년. 도시에서 6남1녀중 막내로 태어나 편하게만 자란 내가 오늘날 농부가 될줄은 주위의 누구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대학 4학년 가을-신혼이었던 우리부부는 청주(淸州) 부근에 있던 잘 아는 분의 포도원에 놀러갔다. 그런데 거기서 처음 본 싱그럽고 탐스러운 포도송이가 우리부부의 운명을 결정지었던 것이다. 그날부터 우리의 관심사는 졸업 후의 농촌생활이었다. 왠지 농부란 말이 내겐 어울릴 것 같지 않을듯 싶었지만, 내 마음은 새롭게 시작될 그날을 하나씩 하나씩 준비하고 있었다. 졸업, 길고 긴 배움의 시간은 이제 끝이 나고 새로운 장(場)이 열리고 있었다. 친구들은 저마다 전망있는 직장을 물색하느라 분주했다. 교수님의 취직권유를 뒤로 하고 전공인 자원공학과도 거리가 먼 내 인생의 출발지, 농촌을 향해 길을 떠날땐 감정의 혼란도 적지 않았다. 나의 농촌행 결심을 털어놓았을때 가족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이제껏 뒷바라지 해주신 부모님의 뜻과는 다른 길이라 죄송했지만 오랜 생각 끝에 결정한 일이라 자신있게 설득할 수 있었다. 결국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데 호응하는 형님들의 도움으로 나중에 갚기로 하고 돈을 빌려 이곳에서 3천여평의 1년생 포도밭을 구입하게 되었다. 말이 포도밭이지 비탈진 붉은 땅에 꽂힌 1년생 묘목뿐이어서 무슨일부터 손을 대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농촌의 겨울은 부엌 아궁이에 장작을 피워놓고 따뜻한 아랫목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이야기꽃을 피운다는데 그해 겨울은 그럴 형편이 아니었다. 처음 시작하는 농사일에 대한 호기심에 가슴이 설레기도 했지만 그보다 낯선 타향에 내동댕이 쳐진듯한 불안감과 농촌관습 및 농사일을 모르는데서 오는 오는 두려움에 편히 있을 수가 없었다. 동네 분위기와 농사일에 조금이나마 빨리 친숙해지기 위해 서둘러 이사한 남의 집 사랑채에는 갈라진 방바닥 틈으로 새어나온 연기가 나의 예측할 수 없는 앞길처럼 언제나 자욱했다. 드디어 봄이 되었다. 그때부터 아내에겐 사랑이 식어지는 남편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1백수십포대의 시멘트를 이겨 3천평 포도밭에 세울 기둥을 신명나게 찍어댔다. 하루하루가 새롭고 힘이 솟았다. 며칠새 시골 새댁으로 변신한 아내도 새벽녘이면 두 식구가 먹을 하루분의 식량을 머리에 이고 밭으로 나섰다. 농촌의 하루는 이전의 하루와 달랐고 쏜살같은 시간이었다. 시멘트기둥이 세워지고 사아사이 철선(鐵線)이 띄워지고 드디어 포도밭이 완성되었다. 생애 최고의 일을 한것 같았다. 날이 갈수록 내집의 필요를 느꼈다. 동네엔 우리가 살 빈집도 없을뿐 아니라 포도밭 가까이에서 생활해야 할 것 같았다. 농가는 신고만하면 쉽게 지을 수 있다는 말에 필요한 자재를 구입했다. 그런데 면사무소에서는 절대농지여서 집을 지을 수 없다며 군청에 가서 알아보라는 것이었다. 『농사를 짓겠다고 농촌에 들어온 사람이 있을 것도 없는데 절대농지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꼭 필요한 집을 지을 수 없다니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우리로서도 어쩔수가 없어요.』 군청에 가서 따져 물어도 대답은 마찬가지였다. 그해에는 안된다고만 하는 관계자를 만나러 1년 가까이 십여차례 이상 50km나 되는 군청엘 드나들었다. 그러나 결국 나의 승리였다. 내가 믿었던대로 해결책이 있었던 것이다. 그 일은 나에게 많은 교훈을 주었다. 내 작은 사업에 성공의 문을 터주는 서곡처럼 느껴졌다. 한해가 어떻게 갔는지 모르게 정신없이 흘러버렸다. 혼자의 힘으로 집을 짓느라 내 인생의 전부가 된 포도나무에게 조차 알뜰한 손길을 주지 않았다. 그해 11월, 어설프게나마 집이 형태를 갖추었을 때 서둘러 이사를 하고는 포도나무 묻기작업에 들어갔다. 한해동안 포도밭 조성, 집건축 등 큰 일을 여럿 치러냈지만 아직 포도나 무재배법엔 문외한(門外漢)이었다. 의문이 생겨 물어봐도 선뜻 가르쳐 주려는 사람도 없었다. 알려주려는 마음이 있어도 주먹구구식으로 농사를 지어왔기에 전달이 잘되지 않았다. 어차피 내가 해결해야 할 일이었다. 이곳 저곳 다니며 견학하고 우리밭과 비교해 보았다. 그러나 별 차이가 없었다. 아니, 차이가 많아도 초보자인 나는 뭐가 뭔지, 무엇에 중점을 두고 관찰해야 할지, 무엇을 물어보아야 할지조차 몰랐던 것이다. 우리밭의 주품종으로는 <다노레드><마스캇베리 A>와 <거봉>이었는데 언제나 거봉이 문제였다. 거봉은 유목기엔 좋은 송이가 달려 초보자도 4년까지는 문제가 없다고 들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조그만 기상변화에도 민감한 반응을 보여 재배하기에 어려움이 많은데다 설상가상으로 개화기때 소나기를 맞아 더 엉망이 되었다. 그나마 수정이 된 송이도 성숙기에 들어가면서 열과(裂果)를 일으켜 송이 전체가 짓이겨 물이 흐르고, 벌과 날파리들의 천국이 돼버리고 말았다. 차라리 거봉밭에는 들어가지 않는 것이 속이 편했다. 내년엔 잘 해봐야지 다짐도 했지만 그 다음해인 86년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왜 이렇게 됐어요』하고 조심스레 물어오는 아내에게 할 말이 없었다. 다만 『나중에 잘 될거야』하는 정도로 얼버무릴 뿐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게으름을 피운것도 아니었다. 한해가 다가도 단 하루도 편히 지냈다고 생각되는 날이 없을 정도로 분주히 움직였다. 이런 내게 더 따져 묻는다는것도 아내로서 안되었다 싶었는지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2년간 계속된 실패는 나의 성취욕을 자극했다. (다시 시작하자! 겸허한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그동안 생각조차 하기 싫던 거봉 밭으로 발길을 옮겼다. 우리밭에 가장 적합한 재배법부터 새로 마련해야했다. 토질과 재배여건이 다른 사람들의 재배방식을 그대로 따른다는 것도 문제점이 많아 농사철이 끝난 뒤 서울 큰 서점에 가서 포도에 관계되는 서적들을 구입해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었다. 또 유기농법에 관한 교육을 통해 토양을 기름지게 하는 미생물발효퇴비 만드는 요령과 생육기 엽면시비를 통한 병해충 저항력 강화, 인산질의 효과적인 시비법등 포도재배에 응용할 수 있는 많은 영농기술을 익혔다. 특히 농협중앙회나 경기도 농민교육원에서 주관한 포도재배교육에 참가, 강사들의 강의뿐 아니라 전국에서 모인 포도재배농민들과의 대화를 통해 많은 기술을 배울 수 있었다. 펜을 놓은지가 오래되지 않아 이론교육에서는 남보다 큰 효과를 올릴 수 있었다. 좋은 이론은 하나씩 실천에 옮겼다. 먼저 농한기인 겨울을 이용하여 발효퇴비를 준비했다. 계분냄새는 참으로 지독했다. 현기증과 함께 코를 찌르는 계분냄새는 몸에 배면 며칠씩이고 지워지지 않았다. 삽에 달라붙으면 잘 떨어지지도 않는 질퍽한 느낌도 좋지 않았다. 그러나 젊은 체력과 의욕은 그것을 감당했다. 3~4일 후였다. 그 지독한 냄새를 풍기던 거름더미가 열을 내며 하얗게 뜨면서 구수한 냄새로 변하여 가슴 깊숙이 파고들었다. 마치 고향의 냄새처럼 나를 평화롭게 해주었고 이 농토에서 몸담을 나를 확인시켜주었다. 『그 냄새 참 조-타.』 『그 냄새가 좋다니 농부가 될 팔잔가봐요.』 『정말 나는 포도농사가 천직(天職)이라고 생각해. 이 일로 누구보다도 만족한 삶을 누리고 있으니까 말야.』 『그렇게 자기 일에 만족하고 열심인 당신이 고맙고 자랑스러워요.』 우리 부부가 일을 하다 말고 말없이 바라보는 포도밭 건너에는 저녁놀이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짧은 영농경험과 교육은 나에게 퇴비의 중요성을 깊이 심어주었다. 쌀겨에 효소제를 넣어 미생물을 증식시키고 그것을 수분이 적당한 거름과 섞어 쌓은 후 비닐을 덮고 3~4일 있으면 무럭무럭 오르는 김과 함께 70도 정도의 뜨거운 열(熱)이 나며 하얀 균사(菌絲)가 번져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열로 인해 해충의 알은 죽게되는 것이다. 토양에 들어가서 뿌리가 양분을 흡수하기 좋은 상태로 만들어주는 미생물은 공기를 좋아하고 수분이 적당한 상태에서 왕성한 증식작용을 하기 때문에 너무 습하지 않게 해야한다. 또 자주 뒤집어주면 거름 전체가 하얗게 뜨면서 수분도 없어져 완전한 양질의 거름이 된다. 이것은 역겨운 냄새대신 향긋한 냄새가 나고 마른상태여서 손쉽게 밭에 넣을 수 있으며, 익균의 증식으로 인해 보비력과 보수력이 좋을뿐 아니라 병해충에 강한 작물로 키워준다. 퇴비를 한삽 한삽 떠옮기면서 머릿속으로 한해의 농사를 지어보았다. 88년은 다른 해보다 더 큰 기대속에 봄이 기다려졌다. 드디어 나뭇가지에 물이 오르고 빠알갛게 터질 듯 부푼 눈망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이를 보며 거는 희망과 벅찬감격을 누가 알까. 가지에 한잎 두잎 새잎이 나고 송이도 보였다. 개화기가 가까워왔다. 이때쯤이면 포도농가는 신경이 곤두선다. 1년 농사의 성패가 판가름나는 때이기 때문이다. 이때 꼭 해야할 작업을 조심스레 실천에 옮겼다. 효소 2kg들이 한봉지와 인삼 75kg, 가리 25kg, 쌀겨 5kg의 비율로 섞어 개화기 전에 2~3% 용액으로 만들어 액체비료 주입기로 포도밭에 관주했다. 며칠이 지났다. 전에 볼 수 없던 기현상이 일어났다. 거봉밭의 모든 화수(花穗)가 찰랑찰랑 흔들릴 정도로 축 늘어져 있는 것이었다. 화수축(花穗軸)의 빛깔은 담록색으로 아주 부드러웠다. 이 모습을 살펴보자니 문든 지난해의 경험이 떠올랐다. 대부분의 화수가 제나름대로 옆이나 위를 향했는데 유독 밑으로 쳐지고 부드러우며 반투명한 담록색을 띤 화수가 몇 개 있었으며 그곳의 결실은 무척 좋았었다. 순간 나의 머리카락이 쭈뼛 일어서는 듯 했다. 나는 크게 외쳤다. 『야! 됐다! 됐어!』 이러한 효과에 대한 설명은 내가 갖고 있는 여러권의 책에서도 아직 본적이 없는 것이었다. 이 정도가 되니 올해 거봉은 수정 뿐 아니라 수확까지도 문제가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며칠간 비만 오지 않는다면 대성공이었다. 매일 새벽 습관적으로 일기예보를 들어왔지만 그 며칠간은 더욱 귀가 쏠렸다. 다행이었다. 개화기동안의 예보는 「맑다」는 것이었다. 하늘을 봐도 당분간 비 걱정은 안해도 될 듯 싶었다. 드디어 깨끗하게 화관(花冠)이 벗겨지며 여기 저기서 꽃이 피기 시작했다. 포도밭은 은은한 향기로 가득찼다.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린가.) 하늘은 굵은 빗줄기로 나의 가슴을 사정없이 때리고 있었다. 참담했다. 날이 밝는대로 빗줄기를 뚫고 포도밭을 헤맸다. 꽃송이들은 무참히 빗방울에 짓이겨져 있었다. (아! 가엾은 꽃송이들….) 시간이 흐를수록 꽃송이들은 흑갈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비는 계속 내렸다. 불완전 수정으로 무핵과(無核果)나 너덜포도가 되는 것은 전례나 재배상식으로 자명한 일이었다. 거의 모든 송이가 화관이 흑갈색으로 변한채 과립에 착 달라붙어 버렸다. 날이 갠 후 한송이라도 건질까 싶어 안타까운 마음으로 손가락으로 퉁겨서 달라붙은 화관을 떨어지게 했다. 그중 특히 심한 것은 결속기 테이프로 송이위를 집어 표시를 해두었다. 어느 정도의 꽃떨이현상과 무핵과과 나타나는지 살펴볼 생각이었다. 낙화후 10여일이 지났다. 확실한 판가름이 나는 때다. 확인해 본다는게 두려웠다. 얼마나 건질수 있을까. 아직도 흑갈색의 화관이 송이에 더덕더덕 붙어 있었다. 손가락을 가만히 대고 조심스럽게 퉁겨봤다. 아닌 웬일인가? 나는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나무도 떨어봤다. 일반적인 상식을 뒤엎는 놀라운 결과가 일어났다. 적당한 착립에 무핵과는 전혀 찾아볼수 없을 정도며 오히려 알솎음을 해야할 정도가 되었다. 테이프로 표시한 송이도 역시 그러했다. 작물은 필요한 조건만 맞춰준다면 우리가 염려하는 정도의 일기변화쯤은 적응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는 사실을 새롭게 깨달았다. 두꺼운 작은 잎과 가늘고 짧은 절간(5cm이내)은 건강미가 넘쳐보였다. 뜨거운 여름도 지나고 한낮의 햇살이 따스하게 느껴질 때 덩굴에 까아만 송이들이 시샘하듯 잎사이로 풍성한 자태를 드러냈다. 정성과 노력에 의해 얻은 열매는 좋은 날씨로 인해 우연히 잘된 열매와는 품질면에서 완전히 달랐다. 시장에 포도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나에게 걸려오는 상인들의 주문전화는 땀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었고 지난날의 수고를 까마득히 잊게했다. 만 4년. 그리 긴 세월은 아니지만 초조하게 풍성한 수확을 기다린 마음으로는 너무도 오랜 시간이었다. 과수중에 제일 볼품없는 포도나무가 그 열매를 맺을땐 가장 탐스럽고 아름다운 나무가 되듯 남루한 작업복과 피로한 생활은 가장 값진 우리의 미래를 약속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포도밭에 설때마다 솟아나는 신선한 의욕이 없었던들 행복한 우리의 오늘이 있었을까. 과거의 뜨거운 땀방울로 이제 우리는 이 농촌에 우리들의 아늑한 안식처럴 마련했으며 우리의 땅에서 태어난 나의 아들이 구김살없이 뛰어 놀 터전을 이루었다. 아! 오늘을 위해 참았던 고통의 나날들. 그동안 포도나무의 거름으로 바쳤던 신혼의 밀어와 사랑을 이제 세식구가 함께 꽃피워가리라.   [최종편집 : 1989/0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