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년. 정훈교 시인(46)이 대구에 작은 책방을 열고 책방 주인으로 지내온 시간이다. 11년 전 정씨는 ‘시인보호구역’이라는 이름으로 책방을 열었다. 사실 책방이라기보단 아지트에 가까웠다.자신을 비롯한 젊은 시인 몇몇이 모여 함께 공부하고 술잔을 기울이는 공간이었다. 그러다 이듬해 가을, 이곳에 책을 잔뜩 갖다놓기 시작했다. 자신이 시인이다 보니 시집이 주를 이뤘다. 그리고 누구나 와서 책을 읽다 갈 수 있도록 공간을 개방했다. 다만책을 구매할 수는 없었다. ‘파는 책방’이 아니라 ‘읽는 책방’의 기능만 했던 셈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정씨는 직장생활과 책방 운영을 병행했다. 하지만 한 해, 한 해 지날수록 걱정이 커졌다. 당시 대구·경북 지역에서 활동하는 30대 이하의 시인과 소설가가 거의 없었던 것이다. 이대로 가다간 지역문학의 소멸, 곧 대한민국 문학의 멸종이다가올 것만 같았다. 결국 2015년 봄, 그는 10년 넘게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냈다. 그리고 시인, 나아가 문인과 예술가를 보호하
고 쳀들을 적극 지원하는 책방 ‘시인보호구역’의 대표이자 시인으로 오롯이 일어섰다. 2010년 등단한 그는 책방을 연 이후 <또하나의 입술> <난 혼자지만, 혼밥이 좋아> 등 여러 권의 시집을냈다.



[여섯 번의 이사와 두 번의 영업 중단]
자금난과 젠트리피케이션(도심에 사람들이 몰리고 개발이 가속화하면서 원주민이 바깥으로 내몰리는 현상)으로 책방은 자주 자리를 옮겼다. 문을 연 이후 지금까지 여섯 번 이사했다. 현재 ‘시인보호구역’은 수성구 두산동에 둥지를 틀고 있다. 골목을따라 걷다 고개를 살짝 드니 건물 2층에 달낸 간판이 보인다. 나무 계단을 따라 올라가자 입구가 나왔다. 입구에서부터 벽면에적힌 시구절이 눈길을 사로잡는다.‘시인보호구역’은 크게 두 개의 공간으로 나뉜다. 작가를 초청해 북 콘서트를 진행하거나 청년 예술가들의 공연·전시를 열어주는 무대 공간과 자유롭게 책을 읽을 수 있는 나머지 공간이다.콘서트나 공연이 열릴 때면 이 나머지 공간이 관객석으로 변신한다. 취급하는 책은 시집부터 소설, 수필 등 다양하다.지난 11년이라는 시간이 ‘시인보호구역’에겐 험난한 비포장도로와 같았다고 정씨는 회상한다. 이사를 자주 한 춰은 물론, 아예책방 문을 닫은 적도 있기 때문이다. 원인은 자금난이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터진 직후, 정씨는 결국 버티지 못하고 책방 운영을 중단했다.


슬픈 안녕을 고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놀라운 소식이 들려왔다.평소 이곳을 애정하고 지역의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던 지역민20여 명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프로젝트명은 ‘시인보호구역 살리기’. 자발적으로 모인 이들은 저마다 ‘시인보호구역’을 살리고자 힘을 보탰다. 금전적 지원뿐 아니라 이삿짐 정리, 책장 정리 등 일손을 보탠 이도 있었다. 덕?에 책방은 문 닫은 지 6개월 만에 다시 문을 열었다. 이때 함께한 20여 명의 지역민을 정씨는 ‘식구’라고 부른다.



[지역 문학의 빛나는 미래]
‘아무리 취지가 좋고 열의가 넘쳐도 경제력이 받쳐주지 못하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겠구나.’
‘시인보호구역’의 재개장 프로젝트를 체험하며 정씨는 자본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이후 책방의 사업 영역 확대를 심도 있게 고민하고 있다. 먼저 예전부터 해오던 시 창작 교실이나 글쓰기·캘리그래피·디카시(디카詩, 자연이나 사물에서 시적 형상을 포착해 디지털카메라로 촬영한 사진·영?에 시를 덧붙인 것) 창작 교실 등은 계속 진행한다. 이에 더해 대구시와 대구관광협회·한국문화예술관광진흥원이 함께 추진하는 ‘청년 여행작가 양성학교’,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주관하는 ‘청소년 독서문화캠프’ 등 공공사업에 지속적으로 참여할 예정이다.


여러 사업과 함께 ‘시인보호구역’의 본래 취지를 지키기 위한 활동에도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중 하나로 ‘시인보호구역 시인선’의 세 번째 출판을 준비 중이다. 줄여서 ‘시보 시인선’이라고도 부르는 이 시리즈의 출간 요건은 오로지 작품성이다. 작가의 스펙이나 인지도, 등단 ?부 등 외부 요인은 모두 배제한다.


간행물 <시인 보호 구역>도 느리지만 꾸준히 이어나갈 계획이다. <시인 보호 구역>은 2016년 월간지로 시작했다. 자금난 때문에 계간지로 바뀌었다가, 이후엔 1년에 한 번 나오기도 했다. 요즘은 정기적이지 않더라도 끊이지 않고 출간하는 것에 의의를 두고 있다.


<시인 보호 구역>은 이름처럼 세 챕터로 나뉜다. ‘시인’ 챕터에서는 등단한 작가의 시를, ‘보호’에서는 등단 여부와 관계없이 지역민이 쓴 작품성 있는 산문을, ‘구역’에서는 특정 지역에 거점을 두고 활동하는 문화 예술인이나 지역의 복합문화공간을 소개한다. 이를 통해 지역의 신진 문인과 예술가를 적극 발굴·지원하고 지역 문학 및 예술의 빛나는 미래를 그려나간다.


“지역민의 애정 없이는 세상에 존재하지 못했을 우리 책방입니다. 앞으로도 지역의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 특히 청년들이 자신의 꿈과 재능을 맘껏 펼칠 수 있는 가교 역할을 할 겁니다.”

[3월, ‘시인보호구역’에서 추천하는 책]
<기록하는 여행을 즐긴다면?>
아주 사적인 발자국 / 허수해 / 시인보호구역
시인 허수해가 쓴 시와 산문, 필름 카메라로 직접 찍은 사진이 함께 실려 있다.저자는 자신의 일상과 여행에서 목격한 장면에 꾹꾹 눌러쓴 문장을 덧붙였다.이를 통해 기억과 추억의 차이를 이야기하고자 했다.



<시사진집이 처음이라면?>
그대 불면의 눈꺼풀이여 / 이원규 / 역락
‘지리산 시인’으로 불리는 이원규가 쓴 51편의 시에10년 동안 찍은 사진을 곁들인 시사진집이다.


사진에서는 자연을 바라보는 애정 어린 시각을,시에서는 이를 통해 깨달은 현실의 이치를 느낄 수 있다.



<시를 공부하고 싶다면?>
슬픔을 말리다 / 박승민 / 실천문학사
경북 영주 출신의 시인 박승민은 절망적 슬픔을 울부?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슬픔을 말리라’고 말한다. 아무리 말리려 애써도 다 마르지 않는 근원적 슬픔을 넘어 삶과 죽음에 진실하게 접근하는 시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로컬 브랜드의 성장을 꿈꾼다면?>
로컬 브랜드 리뷰 2022 / 모종린·김보민·박민아 / 포틀랜드스쿨
로컬 브랜드는 영원히 로컬에 머물 수밖에 없을까? 글로벌 브랜드로도약할 수 없는 걸까? 이 책은 지역을 기반으로 시작해 이제는 아무나 모방할 수 없는 독보적인 콘텐츠를 구축한 로컬 브랜드 112개를 소개한다.



오래 바람에 머물러본 당신, 붉은 꽃잎마다 떨어지지 않는 기록들이군요